미도
응급실에 근무하는 의사에게 휴식시간은 그야말로 금과 같다.
사실 그건 종합병원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이기도 하다. 병원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온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람들을 담당하는 의료진의 수는 누구나 알고 있듯 한정되어 있다. 늘 손이 부족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아쉽다는 말이다.
게다가 오늘 같은 날이면 더 그렇다. 크리스틴 팔머는 응급실의 게이트를 밀고 들어오는 세 개의 응급용 베드를 보았다. 교차로에서 차 세 대가 서로 들이받는 큰 사고를 냈다고 한다. 한 명은 사망, 한 명은 척추에 큰 상처를 입은 중상, 나머지 두 명은 다행히도 골절상만 입었다고 한다. 물론 그 사람들의 처리를 하고 치료를 하며 입원 절차를 밟는 모든 일들은 다행스러운 게 아니었지만 말이다.
교통사고의 여파가 가신 것은 그로부터 두 시간이 지나서였다. 크리스틴은 스테이션 안쪽의 작은 의자에 앉아 겨우 숨을 돌렸다. 등받이 없이 조금만 힘을 주어도 빙글 돌아가는 의자라 마냥 긴장을 풀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래도 서 있는 것보단 앉아있는 게 훨씬 낫다. 피로에 잔뜩 늘어진 몸을 조금이나마 쉬게 해 주는 게 생각 이상으로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다.
어떻게 시간을 보냈더라, 크리스틴은 점차 멍해지는 사고를 붙들기 위해 직접 내려온 커피를 홀짝였다. 다섯 시간 전에 아주 잠깐 응급실을 벗어나 가져올 수 있었던 커피는 몇 모금 마시지도 못했는데 이미 싸늘하게 식은 채였다. 너무하네. 크리스틴은 커피를 마시며 응급실 한 쪽에 있는 시계를 보았다. 오후 5시 46분. 장장 36시간의 근무 일정이 끝나기까지 정확히 14분 남았다.
오후 여섯시가 되자 크리스틴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응급실을 빠져나왔다. 지친 몸은 휴식을 요하고 있었으나 크리스틴에게는 아직 한 가지 일정이 더 남아 있었다. 탈의실로 들어와 이름이 달린 캐비닛의 문을 열자마자 아직 벗지 않았던 가운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크리스틴의 어깨가 크게 들렸다 내려앉았다. 이제 끝났어, 이제 끝났다고. 크리스틴은 양손을 들었다가 도무지 끊길 생각이 없는 전화를 받았다.
[크리스틴?]
“그래, 나야. …스티븐, 지금이 몇 시라고 생각해?”
[여섯시 오 분이군.]
“그리고 당신이라면 오 분만에 옷을 갈아입고 나오기가 힘들 거라는 사실도 알 거고.”
[당연히 알고 있지.]
유독 ‘당연히’라는 말에 힘이 들어간 것 같지만 아마 착각일 것이다. 크리스틴은 열린 캐비닛 옆에 등을 기대어 서고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전화 너머의 상대는 아직 할 말이 남은 것처럼 보였으니 아주 조금은 기다려줄 수 있었다.
[예전의 나라면 분명 독촉하려고 당신에게 전화했을 게 분명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라.]
“다르다고. …오, 잠깐. 전에 보여줬던 그거라면 쓰ㅈ, ……!”
크리스틴의 말이 전부 끝나기도 전에 툭 끊겼다. 근처에서 무언가 타오르는 소리가 들린 까닭이다. 주황색으로 환히 빛나는 원형의 불꽃은 이내 그 사이로 병원 탈의실이 아닌 영 다른 공간을 보여주었다. 언젠가 한 번 쯤 보았던 장소였다. 그리고 크리스틴은 그 속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낸 스티븐 스트레인지를 발견하고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쉬었다.
물론 예전에 한 번 본 적은 있다고 해도 그걸 이런 식으로 다시 보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게다가 옷을 막 갈아입기 직전의 이러한 상황에서는 더더욱. 크리스틴은 옷을 꺼내려던 행동을 멈추고 스티븐에게로 몸을 돌려 섰다.
“사람을 몇 번 놀라게 하는 지 모르겠어, 정말.”
“효율적인 이동 수단이잖아?”
“효율적이라. 그래, 확실히 효율적이긴 하지. 나를 놀라게 하는 것만 빼면.”
한숨과 함께 섞여 나온 목소리에 스티븐이 무어라 말하려다 금세 입을 다물었다. 크리스틴의 눈매가 그리 곱지만은 않은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크리스틴이 그런 얼굴을 할 때면 얌전히 있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비록 예전에는 인지했으나 실천으로는 옮기지 못했지만, 지금은 조금 달라졌으니 말이다.
어디가 달라졌느냐고 묻는다면 그 질문에는 또 애매한 대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겠지만. 어쨌거나 스티븐은 여전히 그를 바라보는 크리스틴에게 본래 하려던 말 대신 다른 대답을 꺼내 놓았다.
“……그래, 다음에는 이렇게 온다고 미리 얘기라도 하지.”
“그럼 저 쪽으로 가서 조금만 기다려줘. 이 옷을 입고 나갈 수는 없잖아?”
크리스틴은 아직 가운조차 벗지 못한 채였다. 스티븐은 그런 모습에 그의 책임이 상당하다는 것을 통감하고 순순히 캐비닛의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스티븐의 모습이 모두 사라지고 난 뒤에야 크리스틴은 아직도 두근대는 가슴을 한 번 쓸어내리고 옷을 챙겼다. 샤워부터 해야 할 것 같다. 샤워실로 가기 전 시계를 다시 한 번 확인하니, 두 사람이 본래 약속했던 저녁 식사 시간까지는 앞으로 한 시간 이십분이 남았다.
며칠을 기다린 사람이 고작 한 시간 삼십분을 못 기다려서 여기로 찾아오는 거야? 크리스틴은 건너편의 스티븐에게 샤워하고 온다는 말을 남긴 뒤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스티븐이 알겠다고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고, 크리스틴은 그 말이 끝나자마자 샤워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스티븐?”
샤워를 끝내고 나온 크리스틴은 아직 물기가 남아있는 머리 끝부분을 어깨 너머로 가볍게 넘겨버리고 여전히 캐비닛 너머에 있을 그를 불렀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이 없어서, 그녀는 스티븐이 그 사이에 다시 돌아가버렸나 하는 생각을 했다. 다시 전화라도 해 봐야 하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기우로 돌아갔다. 어째서인지 약 일 분이 지난 뒤에야 스티븐이 캐비닛 뒤에서 불쑥 얼굴을 내밀었던 것이다. 단순히 못 들었다고 하기에는 무언가 이상한데, 크리스틴은 한 쪽 눈을 가만히 찡그렸다가 이내 가까이 다가오는 스티븐을 보며 손을 뻗었다.
“이제 짐만 챙기면 돼.”
“짐?”
“알잖아?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면 바깥에 나가는 일이 드무니까, 한 번 나갈 때 이것저것 다 챙겨가게 된다고. 당신도 예전엔―아니다, 당신은 좀 별종이었지.”
“내가 고작 그런 평가밖에 못 받다니, 너무 박한 것 아냐?”
크리스틴은 어깨를 으쓱였다. 캐비닛에 있던 종이봉투에 옷을 모두 넣고 가장 안쪽에 있던 가방을 꺼내 한 쪽 어깨에 멨다. 외출할 때라면 작은 핸드백을 들고 가거나 하겠지만, 출근할 때마저 그럴 이유는 없으니―크리스틴은 가방을 고쳐 메고 캐비닛을 닫았다.
“그러면 내가 당신 평가를 어떻게 해주면 좋겠어?”
“유능한 신경외과의지.”
“그 하나 뿐이야? 그 많던 수식어가 하나로 줄어든 걸 보니 어지간히 바뀐 것 같긴 한데…….”
크리스틴은 모호하게 말 끝을 줄이며 스티븐을 보고 있던 몸을 살짝 틀었다. 언제까지고 탈의실에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까 ‘탈의실’…… 바깥으로 나가려던 발이 뚝 멈췄다. 다시 스티븐을 돌아보자 그는 여전히 능청스러운 얼굴로 왜 그러느냐는 것 마냥 크리스틴과 눈을 마주쳤다.
그녀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유감스럽다는 양 웃는 얼굴에 스티븐의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스티븐, 크리스틴이 말했다.
“여기가 어딘지는 알지?”
“모를 리가.”
“탈의실이잖아. 설마 내가 들어간 사이에 아무도 안 들어온 건 아닐 테고. 어디에 있었어?”
그 문제였나, 스티븐이 짧게 말하며 별 일 아니라는 양 문 쪽으로 고개를 슬쩍 돌렸다. 덩달아 크리스틴의 시선 또한 문으로 향했다. 그녀는 스티븐이 무언가 이상한 행동이라도 했나 싶었지만 그에게서 들려온 대답은 전혀 다른 종류의 답이었다.
“수도 고장으로 수리중이라는 공고를 붙여뒀지. 혹시 모르니 문도 잠가뒀고. 그리고 당신이 씻을 동안은 아무 것도 손대지 않고 얌전히 있었어. 그러니까 너무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나가면서 당신이 떼 주면 되는 거니까.”
“세상에……. 그런 식일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기발하긴 해, 스티븐. 그렇다고 잘 했다는 말은 아니고.”
또 다시 한숨을 쉬자 스티븐이 대놓고 입술을 내밀었다. 그러니까 키스의 의미가 아니라 저건 분명히… 크리스틴은 손을 내저었다. 정말 그 이상한 종교 같은 게 스티븐 스트레인지를 바꿔도 한참이나 많이 바꿔둔 게 틀림이 없다. 스티븐이 이 말을 들으면 분명 종교가 아니라 다른 것이라 하겠지만 크리스틴에게는 그런 것들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문 쪽으로 걸어갔다. 예정되어 있던 저녁 약속을 위해서는 어쨌거나 탈의실을 나서야 했다.
“병원 정문에서 만나. 여기서 당신까지 같이 나오면 무슨 일이라도 생길 것 같으니까.”
스티븐은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게이트를 열었다. 게이트는 병원 정문에서는 조금 떨어진 외진 곳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게이트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는 크리스틴에게 잠시 후에 보자는 인사를 남기고 게이트를 훌쩍 넘어 바깥으로 나갔다. 다행히 바깥을 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게이트를 바로 없애고 병원 정문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 크리스틴이 병원 로비를 가로질러 오는 모습이 바로 보였다. 그는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혹여나 크리스틴이 그를 찾지 못할까 싶어서였다.
“그렇게 안 해도 당신은 누구보다 눈에 잘 띄어, 스티븐.”
“당신이 날 발견하지 못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말이야, 그래도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크리스틴은 이쯤 되니 정말로 묻고 싶어 졌다. 병원으로 스티븐이 불쑥 찾아온 이후 그를 다시 만난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저번의 만남에서는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신지 삼십분도 채 되지 않아 그녀에게 긴급 호출이 오는 바람에 만남다운 만남을 가지지도 못했다는 게 맞다.
스티븐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곧 크리스틴도 그와 보폭을 맞춰 걸었다. 두 사람의 목적지는 스티븐이 최근 발견했다던 뉴욕에서 제일 맛있는 식당 중 하나라고 했다. 앉아서 식사를 하기엔 마땅치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듣기는 했으나 크리스틴은 개의치 않았다. 어쨌거나 그녀는 그의 공백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저녁은 어디로 먹으러 갈 생각이야?”
“뉴욕에서 제일 맛있는 샌드위치를 파는 곳이지.”
“오… 샌드위치야? 의외네. 예전처럼 레스토랑을 예약했어, 라는 대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가끔 다른 걸 먹고 싶을 때도 있잖나. 그리고 거긴 정말로 맛있어.”
시답잖은 대화가 이어졌다. 언젠가의 평화로움이었다. 크리스틴은 그의 호언장담에 한 번 믿어보겠다며 팔꿈치로 그의 팔을 톡 쳤다.
불빛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잠시 붙었다 떨어졌다. 아마 오늘의 식사는 오래 이어질지도. 크리스틴은 그런 생각을 했다.
@177A_bleecker